'당신과 나의 안전거리'를 읽으면서 그 책에서 언급된 수많은 소설들을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그 중 가장 먼저 사서 읽은 것은 바로 이희주의 '환상통'.

누군가의 팬이거나 팬이었던 사람이 말하는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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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제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희주의 장편소설. 수상 소식이 발표된 순간부터 아이돌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아온 이 작품은,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를 사랑하는 이십대 여성 m과 만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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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질', '팬덤', '덕질'이라 하면 흔히들 '빠순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어린 소녀들이 그들이 좋아하는 '오빠들'을 향해 미친듯이 소리지르는 모습과 함께. 뭐 요즘은 '미스터 트롯' 때문에 팬덤의 나이대가 확 올라가서 이것이 꼭 소녀들만의 단어는 아니게 되었지만.
이 책은 1~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m의 이야기, 2부는 m과 함께 공방을 뛰었던 만옥의 이야기, 그리고 3부는 만옥을 사랑했던 민규의 이야기.
그들 각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웃기도 했고, 보답받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에 살짝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면서도 생각했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도 사랑이잖아? 어쩌면 더 절절한 사랑 아닐까?
어릴 땐 공부한다고 주변에 눈을 돌리지 않았던 고지식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 같은 아이들을 살짝 경멸하는 쪽에 있는 사람이었다. 왜 저래, 미친 거 아냐? 그런다고 니네 오빠들이 널 알아주니? 이런 생각을 하던, 하지만 그걸 절대 티내지 않(았다고 믿었)던 사람. 그런 이들, 나 같은 사람들에 대해 m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p10
만옥을 만나기 전, 마음속에 사랑이 넘쳐 담아둘 길이 없을 때면 나는 귀중한 이 얘기를 사람들에게 했었다. 대부분 말없이 들어주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무관심과 은근한 조롱을 느낄 수 있었다. 노골적인 사람들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예의바른 사람들은 미소지으며 자신들의 관대함을 들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경멸보다도 그 관용이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라 나는 점차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됐다.
그랬던 나는 한참을 더 나이먹고 난 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 것처럼 사랑에 빠졌다. 차라리 어릴 때였으면 조롱은 덜 받지 않았을까. 내가 전하는 그들의 이야기에 주변 사람들은 지쳐갔고, 나는 정말로 말수 적은 사람이 되어 갔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일코'를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p11
원래 타인의 사랑은 웃음거리가 되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거기에 더해 비난의 대상이 돼요. 단지 특수 직업군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말예요. 우리의 말이나 행동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일이나 혹은 질병처럼 다뤄지지요.
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
그들을 알고 나서 나는 조롱받지 않기 위해 말을 줄였고, 평소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나갔다. 하지만 나는 전보다 훨씬 더 행복했고 어이없게 슬퍼지곤 했다. 그 아이들이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잘 된 것처럼 기뻐했다. 그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안 하던 sns 앱도 깔았고, 놓친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해 미친듯이 양도를 구하기도 했다.
수많은 시간과 돈과 마음을 쓰며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어느 순간 끝이 난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확 떠날 수도 있고,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감정이 빠져나가기도 한다. 예전에 좋아했던 그룹에 대한 마음은 그 중 가장 좋아했던 멤버의 탈퇴와 함께 확 식어버렸었다. 이후 좋아했던 다른 그룹은 그들을 좋아하는 팬들 내부의 싸움을 보는 것에 지쳐 그들이 싫어져 버리기도 했다. 어떤 때엔 너무나 좋았던 공연을 보고 오는 길에 조용히 마음을 접기도 했다. 공연은 너무 좋았고, 그들은 반짝반짝 빛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좋아했던 내 마음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동안 나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괴로워했다(p66).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일까. 그들을 알게 되고 얻게 된 마음의 혼란을 이전의 평온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던 나.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런 사랑이라도 내겐 너무나 소중했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도 내가 가장 소중했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를 항상 중심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세 명의 인물 중 나와 가장 비슷한 m에 마음이 갔다. 하지만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 같은 만옥과 자신을 봐주지 않는 만옥을 향한 마음을 안고 사는 민규도 내 안에 조금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제나 상처받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다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살아온 나는, 용감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을 꺼리면서도 부러워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만옥이 내겐 그런 존재였다. 만옥에 대해 설명하는 민규의 말이 내겐 스타를 사랑하는 팬들의 절절한 마음을 담아낸 이 소설의 여러 구절만큼 인상적이었다.
p138
너는 일생을 사랑하는 걸 취미로 삼은 사람이었다. 본 영화도 읽은 책도 들은 음악도 많지 않았지만 사랑만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했다. 어느 날 고통에 못 이긴 듯 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더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아. 병이야. 그러나 내가 너의 병이 된 적은 없었다. 너의 병이 나만은 비껴갔다. 나는 이것이 두고두고 서운했다.
누군가에겐 비웃음을 살 수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그 무엇보다 귀하고 간절한 마음.
그런 마음을, 그런 시절을 떠올리며 읽을 수 있어서 좋았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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